
2장
클리모프 함장은 출근하고 선수에서 선미까지 배를 한 바퀴 돌면서 점검하는 것이 일과였지만 이번에는 보리소프 부함장에게 그 일을 맡겼다.
"급한 일이 생겨서.. 좀 부탁하네."
보리소프는 대체 요즘 함장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우려스러웠다. 클리모프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감정을 꼭꼭 숨기고 있었지만 확실히 최근 그의 행동은 영 부자연스러웠다. 클리모프는 아스타코프가 노르웨이로 가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다시 답장을 받아오면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다리아가 통화한 남자와 만났냐고 물었을 때 클리모프가 대답했다.
"응. 잘 만났어."
"이름이 뭐야?"
"표도르 아스타코프..."
그리고 클리모프는 무심코 아스타코프가 아버지의 사진을 줬다는 거까지 고백했다.
"뭐?" 다리아는 침착해 보였다. "한번 봐봐."
"나중에. 먼저 코로빈에게 보여줘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알아볼게. 지금 나가봐야 해서.. 만약 아스타코프가 전화하면 저녁까진 돌아올 거라고 전해줘."
"알았어, 페댜."
하루 종일 클리모프는 여단 본부에 있었고, 코로빈은 함선 지휘관들과 훈련을 진행했다. 하선하기 전에 표도르는 선실에 숨어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다시 한번 검토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온갖 의구심이 들고 있습니다. 겨울 전쟁은 끝난 지 오래인데 왜 제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나요? '오리온'호의 항해사 표도르 아스타코프가 아버지에 대해 말해준 게 전부 사실인가요?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자세히 써주세요. 아버지는 이미 저에 대해 다 읽으셨죠? 아스타코프가 저에 대한 신문을 보여줬다고 들었어요.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포옹과 키스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행운이 함께 하기를, 아버지. 1940년 5월 15일, 당신의 아들 표도르.]
클리모프는 편지를 접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저녁 7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부함장 보리소프가 선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야코프 세르게예비치!" 클리모프는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고쳤다. "무슨 일인가? 다가오는 훈련이 또 걱정되나?"
"그것도 그렇고, 함장님이 걱정돼서요." 부함장이 의자에 앉았다.
"걱정할 게 뭐 있나?" 클리모프는 보리소프를 비웃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걱정해야 할 사람은 나지. 배 전체와 승조원들, 야코프 세르게예비치 자네를 포함한 모든 책임이 내 어깨에 달려 있네. 알겠나? 오히려 내가 자네를 걱정해야 해." 클리모프가 웃었다.
"조금 거만하게 들리는군요, 표도르 막시모비치." 보리소프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쭉 훑어보더니 한 문장을 찾아 읽었다. "'과도한 교만은 하찮은 영혼들의 특징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말입니다."
클리모프가 웃으면서 받아쳤다.
"그래, 내가 좀 거만하긴 하지. 하지만 영혼에 대한 얘기는 틀렸네. 내 영혼은 항상 선한 사람들에게 열려있고 적들에게는 닫혀있어... 그래서, 왜 찾아온 건가?"
"어뢰를 점검했는데 하나가 터지지 않아서 교체했습니다."
"벌써? 잘했네! 일 처리는 고맙네만 이만 가봐야겠어. 지금처럼만 하고 있게."
서둘러 하선해 지휘소에 다다르자 멀리서 코로빈이 승조원들과 함께 무언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표도르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모른 척 지나가려 했지만 코로빈에게 딱 걸려 붙잡혔다.
"표도르 막시모비치! 어딜 그리 급히 가나?" 코로빈이 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여단장님.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려고 합니다. 현재 제 업무는 부함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빈이 묘한 시선으로 클리모프를 훑어봤다.
"부함장 보리소프는 어떤가? 자네를 대신할 잠수함 함장으로 추천할만 하나?
클리모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저 레닌그라드로 갑니까?"
"결정된 건 아니지만 함대 사령관이 반대하지도 않을 것 같네. 그래서, 부함장은 어떤가?"
클리모프는 보리소프에게 몇 가지 단점이 있지만 충분히 함장이 될 만하다고 말했다.
"5년 동안 부함장으로 복무했으니 이제 진급할 때도 됐습니다."
"알겠네. 그럼 이만 가보게나."
클리모프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제와 똑같이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붉은 등대 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스타코프도 어제와 같이 검은색 코트를 입고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가 클리모프를 보자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안 오시는 줄 알고 그냥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상관이 붙잡아서요." 클리모프가 그의 옆에 앉았다.
"편지는 가져오셨습니까?"
"예. 길진 않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 적었습니다." 표도르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아스타코프에게 건네 주었다.
아스타코프는 클리모프의 입꼬리가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건가.'
"한 달 안에 항해에서 돌아와 답장을 가져오겠습니다. 기대하세요."
아스타코프의 말을 듣고 클리모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답장해 주실까요?"
"왜 안 그러겠어요? 어떤 아버지가 소중한 아들의 편지를 무시하겠습니까?" 아스타코프가 봉투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맞아, 아버지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데.' 표도르는 거의 이 말을 입 밖으로 뱉을뻔했다.
아스타코프가 무언가 생각하다 물었다.
"코로빈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했나요?"
"우리는 조용히 하기로 합의했지 않습니까. 약속은 지킵니다."
"사진도 보여주지 않았다고요?"
"네. 하지만 곧 그에게 보여줄 생각입니다. 어떻게 얻은 건지 물어보면 참전 용사가 보내줬다고 말씀드릴 려는데 괜찮겠습니까?"
'이 부분에서는 나를 신뢰하는군.' 아스타코프가 생각했다.
"코로빈이 당신 아버지가 포로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 아직 불확실합니다. 결정하는 건 그쪽 몫이지만 아직은 말하지 말죠..."
그들은 한동안 바다와 배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스타코프는 자신이 복무했던 잠수함과 지금의 잠수함은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잠수함이라면 제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외부인은 못 타지 않나요?"
"여단장의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한번 시도해 보죠."
"감사합니다, 표도르 막시모비치..."
자신의 호텔 방으로 돌아온 아스타코프는 옷을 벗고 룸 메이드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봉투를 열어 편지를 확인했다. ['오리온'호의 항해사 표도르 아스타코프가 아버지에 대해 말해준 게 전부 사실인가요?] 아스타코프는 고민했다. 클리모프가 아버지가 어떻게 포로로 잡힌 건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정확한 답신을 가져와 전달해 준다면 표도르는 매우 감사할 것이고, 그의 잠수함에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확실히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클리모프 소령은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리아는 이를 알아차리고 저녁을 먹는 표도르의 맞은편에 앉았다.
"페티카는 어디 갔어?" 표도르가 물었다.
"학교 수학여행. 배 타고 간다더라. 아무튼 아스타코프랑 또 만났어? 기분 좋아 보이네."
"어..." 표도르는 모든 세부사항에 관해선 침묵했다.
"아스타코프를 믿어?"
표도르는 다리아의 물음에 몸을 떨었다. 그 자신도 아직까지 떨치지 못한 의문이었다. 아스타코프를 믿어도 될까? 표도르는 아스타코프와 약속한 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또 만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 사진은 언제 보여줄 거야?"
표도르가 조용히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리아는 남편이 너무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곧 표도르가 돌아와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다리쉬카."
다리아가 건네받은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와 꼭 닮았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래서 아스타코프는 대체 누구야? 몇 살이고 뭘 원하는 거지? 이렇게 아무 대가도 없이 도와준다고? 당신 아버지를 아는 거면 코로빈도 알겠네?"
다리아의 질문들은 간단했지만 표도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그가 말했다.
"그냥 아버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만나는 거야. 아스타코프는 믿을만해. 나랑 또래인데 항해에서 돌아오면 집에 초대할 테니까 그때 한번 직접 만나봐."
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표도르의 제안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출근한 클리모프는 즉시 근무 중이던 레츠키에게 달려갔다.
"좋은 말씀 아주 감사합니다, 동지!"
레츠키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무슨 뜻인가, 표도르 막시모비치?"
"본부에서 맹렬히 절 비판하셨더군요. 항로를 잘못 설정한 건 조타수 바신 대위였습니다. 제가 아니라요!"
"많이 흥분했군." 웃고 있던 레츠키가 표정을 굳히고 진지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바신은 자네 부하이니 그의 실수도 자네 책임이네. 이번 기회로 많이 배웠길 바라지, 클리모프 함장."
레츠키의 대답에 클리모프가 화를 죽이고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동지 말이 맞습니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혹시 아르한겔스크에 연락 가능하십니까? 항구에 '오리온'이라는 상선이 출항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누굴 찾나?"
"항해사 표도르 아스타코프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데.." 레츠키가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아스타코프...? 아, 기억나는군! 무르만스크의 항해사 훈련소에서 만난 적 있네. 북방 함대의 잠수함에서 복무했다지. 좋아, 찾아서 알려주겠네." 레츠키가 수화기를 들고 이만 나가보라고 명령했다.
잠수함으로 돌아온 클리모프는 부함장과 함께 배를 한 바퀴 돌며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곳이 알맞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단 한 곳, 조타실의 테이블에만 지도가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조타수 바신이 클리모프를 보고 당황하면서 경례했다.
"이게 지금 무슨 꼴이지?" 클리모프가 화를 참으며 물었다.
"지도 작업을 하다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가서.. 지금 정리하겠습니다."
클리모프가 결국 분노하면서 소리쳤다.
"당장 치워! 안 그래도 레츠키 중령님과 자네의 지난 실수에 대해 얘기했는데..." 표도르의 시선이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병에 꽂혔다. "저건 뭐지?"
"소, 소독용 알코올입니다 함장 동지, 지금 당장 치우겠습니다!" 바신이 더욱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할 말을 잃은 클리모프는 함장 실로 돌아가 부함장 보리소프를 질책했다.
"야코프 세르게예비치, 작은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짐을 잘 이해하고 있겠지? 바신을 더 엄격하게 살피게."
"예, 알겠습니다." 보리소프가 입술을 깨물면서 대답했다.
표도르가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위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클리모프 함장 동지는 당장 올라와주십시오!"
클리모프가 서둘러 다시 레츠키를 찾아갔다.
"어제 새벽 1시에 항해사 아스타코프가 탑승한 화물선 '오리온'이 출항했다고 하네."
"감사합니다, 바실리 이바노비치!" 표도르의 마음속 돌덩어리가 치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스타코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이제 코로빈에게 사진을 보여줘도 괜찮겠지.'
얼마 안가 코로빈이 기분좋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표도르 막시모비치, 축하하네!" 코로빈이 쾌활하게 외쳤다. "마침내 자네의 입학 허가를 받아냈네. 해군 참모총장이 반대하던데 그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었나?"
"봄에 여단장님이 휴가 중일 때 훈련용 기뢰를 설치하다가 사고가 있었습니다. 설치하던 젊은 공병의 실수였는데, 제독께서 많이 언짢으셨나 봅니다..."
코로빈이 진지하게 말했다.
"글쎄, 표도르 막시모비치. 자네는 지휘관이자 함장이고 그만한 책임이 있네. 전체 승조원들, 그 젊은 공병의 실수도 다 자네의 실수나 마찬가지네. 아무튼 허락을 받았으니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두 달 후에 학교로 떠날 수 있을 걸세. 요즘 독일군이 심상치 않더군. 오늘도 아침 5시에 독일군 비행기가 해군기지 상공을 지나갔네. 정찰이 틀림없겠지!"
코로빈이 클리모프의 손에 들려있던 사진을 발견했다.
"그건 뭔가?"
"제 아버지인 막심 클리모프입니다." 표도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막심 클리모프... 그래, 아주 훌륭한 갑판장이었지. 어디서 얻었나?"
"화물선 '오리온'의 항해사가 주었습니다."
"1939년 여름 해군 신문에 실렸던 사진이군." 사진을 유심히 살펴본 코로빈이 말했다. "아버지 일은 유감일세."
클리모프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스타코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며 원하던 해군대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됐다. 집에 도착해 다리아에게 소식을 전하자 그녀가 뛰면서 기뻐했다.
"마침내 당신을 알아본 거야! 페댜, 우린 지금 당장이라도 레닌그라드에 갈 수 있어. 당신이 올 때까지 언니네 집에서 지내면 돼."
"표트르 학교는 어쩌고? 자퇴라도 시키게? 진정하고 서두르지 마 다리아. 아직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2주 후 이른 아침 클리모프는 전화 벨 소리에 깨어났다. 아스타코프였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서두르는 것처럼 짧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저녁에 뵈러 가겠습니다."
"혹시... 아버지를 만난 건가요?" 표도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네 만났어요. 편지를 전해주고 답장을 가져왔습니다." 아스타코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리아가 드레싱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또 아스타코프야?"
"그래. 이번엔 우리 집에 올 거야."
클리모프가 외투를 입으면서 나갈 준비를 하자 아들 표트르가 서둘러 방에서 나와 그에게 안겼다.
"아빠, 저도 배에 데려가 주면 안 돼요? 학교 친구 비탸가 어제 구축함에서 일하는 아버지한테 놀러 가서 함교까지 올라가 봤대요!"
표도르가 모자를 쓰고 아들을 쓰다듬었다.
"당연히 되지 페탸. 일요일에 배를 타고 살니 섬까지 가는 건 어때? 대신 공부 열심히 해야 데려다줄 거야. 전에 지각했다고 선생님이 다 말해줬어."
"그.. 쉬는 시간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밖에 나갔다가 조금 늦은 거예요. 먹느라 시간을..."
다리아가 표트르를 떼어놓으면서 말했다.
"페탸, 아빠 그만 귀찮게 해. 너도 이제 학교 갈 준비해야지."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클리모프는 들뜬 마음으로 아스타코프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스타코프는 늦게까지 오지 않았고 기다리다 지친 새벽에서야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접니다, 아스타코프. 정말 죄송합니다. 기차를 놓쳐서 오늘은 못 가고 내일 오전 8시에 방문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침이면 클리모프는 근무하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낮에 밖에서 만나자고 했으나 아스타코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오후에는 안됩니다. 딱 한 시간이면 됩니다. 저보다 당신에게 더 중요한 일 아닙니까."
"좋습니다." 클리모프는 결국 동의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다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일 아침 아스타코프가 올 거야."
"그럼 당신만 보겠네. 나 내일은 아침 일찍 출근이야."
그녀의 말대로 아침 일찍 다리아는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동안 클리모프는 여단장에게 한 시간 늦을 것이라고 전화하고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데 누군가가 노크했고 문 앞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스타코프가 서있었다.
"어서 오세요, 표도르 세르게예비치."
아스타코프가 미소 지으면서 조용히 집으로 들어섰다. 그가 갈색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난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하자 클리모프가 초조하게 말을 끊었다.
"아버지의 편지는 가져오셨습니까?"
"예, 표도르 막시모비치. 약속했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 여깄습니다." 아스타코프가 서류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 주었다.
클리모프는 참을성 없이 그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채고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나도 울면서 겨우 편지를 읽었단다. 사랑하는 페덴카, 정말 너니?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중요한 것만 대답해 주마. 아스타코프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고 나는 지금 트론헤임에 있단다. 표도르를 만나서 참 행운이었지.
부탁이 하나 있다, 아들아. 사진 좀 찍어서 아스타코프를 통해 보내주렴. 네 엄마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고. 그녀가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구나. 우리 아들, 트론헤임에 올 수 있다면 당장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제냐 코로빈이 이제 네 상관이라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에게 내 얘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좋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클리모프는 잠시 편지에서 몸을 떼고 생각했다. '코로빈도 아버지의 생존을 좋아할 거라고 말해줘야겠어. 이번에 그가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나쁜 감정은 없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머지도 마저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페댜, 아스타코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겠지. 그러나 어떻게 편지로 우리의 회포를 다 풀 수 있겠니. 정말로 직접 널 한번 보고 싶구나. 단 하루 만이라도 좋으니 트론헤임에 올 수 없겠니? 일단은 사진 한 장이라도 좋단다... 기다리마.]
클리모프는 다 읽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워두고 구슬프게 말했다.
"거기서 얼마나 힘드실까..."
"낯선 외국 땅에서 고생하고 계시죠." 아스타코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이번에 가족들끼리 남쪽으로 휴가를 갔다 올 예정이라 다음 항해 일정은 아직 없습니다. 일단 휴가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죠."
아스타코프가 주머니에서 은색 체인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고 말했다.
"벌써 10시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쪽도 늦은 거 아닙니까? 이거 참 죄송하네요."
"선원들은 항상 선장을 기다리는 법이죠. 괜찮습니다." 표도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스타코프가 천천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우리 선장님이 제 휴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장기 항해에 보낼 수도 있고 당장 또 노르웨이로 보낼지도 모르죠. 누가 알겠습니까. 군복을 입진 않지만 우리도 항상 선장의 말에 따라야 합니다." 한숨을 쉬면서 불만을 토로하던 아스타코프는 끝으로 밝게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일이 생기면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클리모프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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