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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고록]

[번역/회고록] 판텔레예프 제독이 기억하는 쿠즈네초프 제독

by 쿠악이 2023. 12. 11.

낚시를 하는 쿠즈네초프

 

 

삶의 풍파에 어릴 때 만난 인연이 멀어지기도 하고 인생의 방향이 우리를 떨어트려 놓을 때도 있지만 계속 연락을 유지하면서 서로를 잘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저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6년 니콜라예프시의 우울하고 쌀쌀한 가을 날이었습니다. 천장이 높은 크고 오래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막사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집이나 숲으로 둘러쌓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막사에는 부크강의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의 승무원들이 거주했습니다. 이 배는 가까운 장래에 흑해 함대에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순양함의 승무원을 배치하기 위해 매일 다양한 전문 분야의 수병들과 해군학교를 졸업한 지휘관들이 막사에 도착했습니다.

축축하고 쌀쌀한 공기에 재채기를 하면서 나는 당직 장교 방에서 당직 장교와 함께 앉아 진한 해군 차를 마시며 큰 난로에 마른 장작을 주기적으로 넣고 있었습니다. 막사에는 아직 증기난방이 없었기 때문에 수십 개의 크고 오래된 난로가 있었습니다. 순양함의 선임 부사령관이 아팠고 내가 그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복도에서 "사령관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 "복도 끝에 열려있는 문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젊고 날씬한 장교 세 명이 서류 몇 장을 손에 들고 활기차게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제복, 주름 잡힌 바지와 아직 세탁하지 않은 소매의 두 줄무늬를 보니 프룬제 해군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함장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막사를 떠나려는 순양함 사령관 N.N. 네스비츠키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명령을 살펴보고 각 서류에 "Ст. пом."이라는 짧은 사인을 적었습니다. 이것은 수석 항해사에게 가라는 뜻입니다. 다른 지시는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나에게로 왔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친절하지만 극도로 과묵한 네스비츠키를 만난 뒤 혼란을 겪고 있는 그들을 보고 1년 전에 이 모든 것을 똑같이 겪은 나는 첫인상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그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가장 대표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동료들보다 더 수다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행은 어땠습니까? 밥은 먹었나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두 명은 침묵했고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직설적으로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솔직함에 마음을 빼앗겼고 심지어는 기뻤습니다. 나는 "좋아요,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당직 조리병을 소환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났지만 이제 도착한 젊은이들에게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그 후 쿠즈네초프가 저에게 와서 동료들을 대신해 저녁 식사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저녁차를 마시면서 저는 쿠즈네초프를 제 방으로 초대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순양함, 지휘관 및 전문가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과 발트해에서 아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항해를 매우 좋아했고 생도 시절에는 보트를 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보트 타기는 제 취미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대화가 활기차고 우리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에 대해 꽤 잘 알게 되었고 대화에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소는 건조 중인 순양함의 다양한 기계장치들을 조립하고 있었습니다. 순양함의 모든 지휘관은 특별위원회로서 이 중요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화재 시스템과 다른 것을 승인하는데 관여했습니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했습니다. 때때로 오후에 쿠즈네초프를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소심한 신인의 인상을 주지 않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선소 엔지니어들에게 묻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잘생기고 매우 키가 큰 선박 엔지니어이자 조선감독위원회(комнаб) 위원장인 드로즈도프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선소에서 함께 집으로 걸어가면서 선박 건조 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저에게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네초프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를 안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드로즈도프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놀라울 정도로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주 겸손하고 매우 사업가 같았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세세하게 이해하더군요. 이 사람은 분명 크게 될 겁니다." 나는 드로즈도프의 의견에 동의하고 새로운 해군 장교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예측은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취역한 순양함은 종종 바다로 나가 격렬한 전투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함대 사령관 M.V. 올로프도 우리와 함께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 역시 당직 사관 쿠즈네초프가 조타수와 신호수에게 얼마나 대담하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여러 날을 보낸 후, 순양함의 위원장이자 사교성이 뛰어났던 케드린은 함대 사령관이 쿠즈네초프에게 관심을 두면서 그를 계속 주시하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올로프는 위원장과 작별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순양함의 수석 항해사로 함교에서 함장의 바로 옆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강한 의지는 배에서 근무하는 날마다 그 진가를 발휘하고 발전해 갔습니다.

함께 복무하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잘 기억납니다. 함대가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해군 교육을 이수한 당직 사관이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당직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차르 해군 부사관 출신의 지휘관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은 이동 중 경계, 특히 항해와 수로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특수 교육을 받지 않은 항해사들은 자신들이 함교의 주인이라고 느꼈고 당직 사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들을 건너뛰고 조타수와 신호수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습니다.

쿠즈네초프가 당직을 섰던 때였습니다. 배의 위치를 결정하고 새로운 항로로 항해하도록 함장의 허가를 받은 후 나는 조타수에게 항로를 변경하라고 직접 명령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이 모든 말을 듣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순양함이 새로운 항로에 들어섰을 때 그는 나를 브릿지 윙으로 불러 무례하지 않게 매우 명확하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판텔레예프, 저는 지금 당직을 서고 있고 규정에 따라 배의 운행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제가 조타수에게 항로를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건 규정에 명시되어 있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상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쿠즈네초프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았고 나도 규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항해사들은 위 같은 상황으로 인해 버릇이 없어졌고 어떤 식으로든 당직 사관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지 말이 맞습니다, 고려하겠습니다." 적당한 때에 순양함 함장에게 우리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항상 그렇듯 중얼거렸습니다. "글쎄, 쿠즈네초프가 옳네, 참고하게." 이걸로 우리의 관계는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쿠즈네초프가 해군 아카데미로 떠난 후, 우리는 종종 저녁에 그를 회상했고 각자 그를 다르게 판단했습니다. 일반적인 의견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가 사람들에게 매우 솔직하고 순수하며 진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크고 작은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모든 일에서 동지들을 도왔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상관이나 부하에게 아첨하는 법을 몰랐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동료들에게 무례할 때도 있었지만 저는 그것이 진심 어린 따뜻한 의도라는 것을 분명 보고 느낄 수 있었고, 아무도 불쾌해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상관에게 반박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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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을 표현하는 직설적인 태도는 그의 성격의 기본적인 특성이었고, 불행히도 그의 커리어 속에서 사건의 중심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상사들과의 관계만 손상시켰습니다.

1년 후 저도 해군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우리는 다시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해군의 다양한 이론적 문제에 대한 그의 대담한 견해는 그가 학교의 학생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저는 쿠즈네초프, 알라푸조프와 함께 프랑스인 무슈 고바르한테서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진전에 매우 만족하며 저와 알라푸조프가 게으르다고 꾸짖었습니다.

(이들이 다닌 해군 아카데미는 현재 '쿠즈네초프 해군 아카데미' 입니다.)


 

1936년, 예기치 않게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와 오랜 시간 동안 헤어졌습니다. 그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해군 군사 고문으로 임명되고 스페인으로 떠났습니다. 해군, 육군 지휘관인 제 친구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항상 진실하고 충실하게 행동했으며 스페인 장교들과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고 용기 있는 판단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태도로 빠르게 권위와 깊은 존경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곧 소련과 스페인 장교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제 소꿉친구인 N.A. 피테르스키는 이렇게 얘기해 줬습니다. "스페인 함대의 지휘관이 내 제안에 대해 고집을 부리면 나는 '알았습니다, 하지 마시죠, 이건 니콜라스*한테 보고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스페인 함장은 내 멱살을 잡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크게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다녀온 제독들이 저에게 들려준 비슷한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 쿠즈네초프는 스페인에서 Don Nicholas Lepanto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스페인에 이어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태평양 함대 제1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빠른 진급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모든 개인적인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던 그는 모든 부조리함에 대해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떤 티도 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솔직하고 사람들에게 엄격하고 공정했으며,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고 그의 판단에 있어서도 솔직했습니다.

1939년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해군 인민위원부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겨우 35세였습니다. 적의 수와 질투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 해군부 장관급의 직책)

쿠즈네초프의 임명은 해군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장교들은 드디어 함대를 이끌어 갈 해군을 찾았다고 솔직하게 평했습니다. 해군의 삶과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해군학교나 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무작위적인 사람들이 오랫동안 우리를 이끌려고 하는 것을 보는 건 수치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함대 사령관을 지낸 쿠즈네초프에 해군의 모든 사람들이 만족했습니다.

 


 

해군총참모부(ГМШ)에서 근무하는 동안 저는 쿠즈네초프와 관련된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1943년 5월 초, 나치는 볼가강에서 액체 연료를 실은 바지선 여러 척을 침몰시켰습니다. 수천 톤의 기름이 불타고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이에 매우 분개하고 정치국을 소집하여 쿠즈네초프와 매섭게 이야기하고 볼가강 소함대 사령관을 즉시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밤에 열릴 회의에서 승인할 새로운 사령관 후보를 제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나는 이 회의에 대한 세부 사항을 몰랐고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나에게 어떤 경고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모두 잠든 5월 초 어느 날 밤 전화가 울리고 무례한 남성의 목소리가 20분 안에 소령(성은 기억나지 않음)이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이 잘 기억납니다. 나는 서둘러 전화로 해군 인민위원을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정말 20분 후 소령이 도착했고 우리는 크고 어두운 차를 타고 크렘린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어둡고 군사적인 모스크바는 우울했습니다. 어느새 저는 밝은 방에 들어섰고, 그곳에는 NKVD 제복을 입은 많은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기시간 동안 정치국의 모든 구성원이 나왔고 그들과 함께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가 걸어갔습니다. 그는 미코얀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인민위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무언가에 대해 격앙된 채로 얼굴을 붉히고 특이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정치국의 모든 구성원이 스탈린의 사무실로 들어갔고 몇 분 후에 나도 그곳에 초대되었습니다. 거의 정문에서 나는 앉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 안을 둘러보니 정치국 위원들이 모두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커다란 벽난로를 등지고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은 채 매우 격분한 듯한 표정의 우리 해군 인민위원은 위엄있게 서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그를 바라봤지만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해군에서의 복무와 볼가강에 가본 적이 있는지에 대한 온갖 종류의 질문 폭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볼가강을 가본 적도 없고 항해해 본 적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모든 정치국 위원들은 그곳에 서 있던 해군 인민위원 쿠즈네초프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누군가가 "쿠즈네초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몸을 더 곧게 펴고 난로에서 물러나 모든 사람을 엄하게 둘러보고 크지만 차분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스탈린 동지에게 "강 전문가"는 없다고 보고했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제독이 충분히 함대에 잘 대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판텔레예프 제독을 볼가강 소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합니다." 나를 향한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고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다시 난로에 기대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기실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가 또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쾌활하게 사무실을 나왔고 얼굴에서는 가면이 벗겨져있었습니다. 그는 나한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지."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그는 차 안에서 저를 보고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축하하네 판텔레예프, 그대는 이제 볼가강 소함대의 사령관이야,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네..."

 


 

북방에서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품위를 특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1944년 가을 저는 카라해에서 아르한겔스크까지 쇄빙선 두 척을 가져오는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중 한 척은 '이오시프 스탈린'호 였습니다. 스탈린 숭배의 시대에 그것을 잃는 것은 기함의 함장을 잃는 것과 같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해군 인민위원부에 전체 작전 계획을 보고하고 독일 잠수함이 바렌츠해의 카라해 출구와 백해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완벽한 기밀유지를 위해 규정에 따른 완전한 통신보안 유지를 요청했고 해군 인민위원은 허가를 내렸습니다. "그럼 그럼"-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작전은 1944년 10월에 이루어졌으며 부대는 24척의 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가을 날씨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춥고 낮이 짧았으며 바다는 불편하고 우울했습니다. 우리 무선 정찰팀은 해안에서 적 잠수함 몇 척이 바다에서 탐지되었다고 보고했지만 그 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확한 시간에 쇄빙선을 만났지만 적이 우리의 경로를 추측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잠수함이 있을 수 있는 곶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북쪽으로 몇 도 변경했습니다. 바다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고, 우리는 당연히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늦게 목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초계함들은 잠수함의 소음을 반복해서 감지하고 폭격을 가했습니다. 북방함대 사령관으로부터 위치를 알려달라는 전보 두 통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무전 통신병들에게 전보를 보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당연히 답신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해군 인민위원으로부터 짧지만 엄한 명령이 담긴 전보를 받았습니다."당신의 위치를 보여줄 것을 명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분 동안 나는 해군 인민위원이 내린 명령에 매우 걱정했습니다. 파시스트의 도발이면 어쩌지라는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고 나는 쿠즈네초프를 말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고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보에 답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거의 하루 늦게 몰로톱스크(현재는 세베로드빈스크)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정박하자마자 해군 인민위원이 쇄빙선의 근황을 궁금해하며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에 저는 즉시 부대로 불려갔습니다. 나는 인민위원에게 전화를 걸어 작전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는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왜 함대 사령관과 내 전보에 답하지 않았지?" 목이 매여서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나?"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내 말 이해하고 있나?" 나는 폐에 공기를 채우고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한 다음에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인민위원 동지! 모스크바에서 당신은 나에게 통신보안을 지키라고 명령했고 나는 명령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침묵... 인민위원의 숨소리가 분명하게 들렸지만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친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옳은 일을 했군, 더 이상 질문은 없네." 전화 수화기가 딸깍 소리를 냈습니다. 만약 인민위원이 그런 명령을 한 적이 없다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나는 그것을 증명할 문서가 없었기 때문에 제 함대 지휘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그러지 않을 사람이었고 나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결코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품위 있는 사람이었고 약속을 지키는 기사였습니다. 그때 내 눈시울이 촉촉해졌습니다. 해군 인민위원의 답변은 저에게 가장 큰 보상이었고, 저는 이 사건을 평생 동안 약속을 지키는 방법의 모범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사례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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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판텔레예프

 

Пантелеев, Ю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 Википедия

Материал из Википедии — свободной энциклопедии Ю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Пантелеев (18 (31) октября 1901 (1901-10-31),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ru.wikipedia.org

 

원문

 

쿠즈네초프 전후 회고록에 헌정된 헌정글입니다.

https://coollib.com/b/264965/r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