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 ㅡ 대령, 해군 과학 박사
저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와 친밀했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23-1926년 동안 그와 함께 해군학교에서 공부했고, 1938년 5월까지 태평양함대에서 함께 복무했습니다. 저는 태평양함대 전투훈련부 참모장으로서 함대의 전투 훈련을 계획하고 감독할 때 그의 지시와 조언을 따랐으며, 1941~1942년과 1946~1947년에 해군 인민위원의 직속 정무부서 책임자로서 그의 지시와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저는 직무상 함대 내외에서 그와 동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학교 시절 규율을 잘 지키고 근면하며, 외향적이고 사무적인 체계성과 문화 교양을 갖춘 모범적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순박하며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친구였기 떄문에 다른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냈지만, 특히 N.I. 니콜라이치크와 V.F. 트리부츠와 친밀했습니다.
1926년 우리는 해군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쿠즈네초프와 저는 학업 성취도 순위 10위권 내에 들었고 보상으로 바다와 배를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흑해와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를 선택했고, 저는 발트해와 전함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를 선택했습니다. 1926년 10월 우리는 각자 선택한 배로 떠났습니다.
1938년 우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태평양함대(ТОФ) 본부의 부사령관으로 쿠즈네초프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 역시 그 쿠즈네초프가 제가 아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받은 전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체르노쇼크,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예."
"옐리세이, 왜 친구를 만나러 오지 않는 건가?"
"콜랴, 자네야?"
"그래! 나야, 대구 콜랴." (우리는 모두 별명이 있었는데, 쿠즈네초프는 학교에서 나오던 대구 요리를 좋아해서 '대구 콜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지금 어딘가? 어디서 전화를 걸고 있는 거야?"
"부사령관 사무실로 오게!"
잠시 후 우리는 만나서 서로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후 저녁에 그의 집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는 지난 11년 동안의 삶, 군대 생활, 함대 상태, 참모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쿠즈네초프는 태평양함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학교 친구들의 근황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태평양함대에 친구들이 10명이나 있고 모두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사심 없이 규정과 의무를 지키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갔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이에 대해 나에게 말했습니다. "근무하는 동안 우리는 법적 관계를 준수해야 하지만, 근무 외 시간에는 여전히 서로 좋은 친구여야 한다고 동지들에게 전해주게. 오랜 동지관계는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하는 법이지."
위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가 직접 겪었거나 목격했던 여러 사례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38년 5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저는 아내와 이혼하고 가족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저는 이 비극적인 일을 힘들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와 군사위원회 위원 야코프 바실리예비치 볼코프가 사태를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쿠즈네초프가 제게 말했습니다. "옐리세이, 야코프 바실리예비치와 함께 자네의 아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자네가 얼마나 힘들지 알아, 자네는 환경의 변화가 필요해 보여. 얼마 전 블류헤르가 내게 전화를 걸어 특수 붉은 깃발 극동 부대(ОКДВА) 사령부의 작전 부서에서 부서를 구성하고 지휘할 수 있는 학식 있고 훌륭하며 경험이 풍부한 사령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네. 이건 ОКДВА와 ТОФ간의 효과적인 협력을 위해 꼭 필요해. 야코프 바실리예비치와 상의한 결과 자네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네. 하바롭스크로 가주게나. 여기서는 힘들겠지만 새로운 환경에서는 기분이 나아질 것이고 더 빨리 좋아질 거야. 나는 자네를 보내거나 부서를 바꾸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네를 위해 결정한 걸세. 하바롭스크로 가는 것에 동의하나?" 저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일주일 후 저는 G.M. 슈테른 참모총장의 환영을 받으며 하바롭스크에 있는 ОКДВА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좋은 숙소를 제공받았고 모든 게 준비되어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점차 외로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 9월 22일, 저는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특수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인민의 적'으로서 여러 조항에 따라 기소되었는데, 사형이 확정적이었습니다. 1939년 초에 저는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특수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의 수용소에서는 굴욕적이고 감당하기 힘든 심문을 받았으며, 정신적 압박을 위해 항상 밤 12시 이후에 '검은 까마귀'를 타고 심문실로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저의 인간적 존엄성과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붙였습니다.
1939년 말에는 재판에 필요한 기소장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인민의 적'들로부터 배운 가르침에 따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심문 중에 주어진 모든 '자백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 또한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법원이 자백을 관대하게 봐주고 처벌을 줄여줄 거라고 회유하며 설득하였으나, 이 또한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제가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용소에는 "무릎을 꿇고 선처를 비는 것보다 서서 죽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하였습니다. 그 이후 저는 오랫동안 혼자 남겨졌습니다.
저는 앉아서 제 지난 삶을 끝도 없이 돌아봤습니다. 너무 힘들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와 수용소 동지들이 이토록 힘든 시련을 보내고 있는 건지 원망스러웠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누가 이런 상황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삶에 대한 믿음을 잃은 수용소 동지들 중 일부가 얼마나 심각한 무기력과 우울증 상태에 도달했는지 보았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믿음, 좋은 결과에 대한 믿음과 함께 제 자신과 제 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0년 3월 초, 저는 병사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검사 사무실로 직접 걸어갔습니다. (우린 항상 '검은 까마귀'에 태워져 심문실로 끌려갔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였습니다.) 검사는 정중하게 저에게 앉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이십니까?" 그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저게 물었습니다. "예, 저는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입니다." 저는 정중한 대접에 놀라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당신이 기소된 정치 관련 혐의는 형사 관련 혐의로 대체되었습니다. 당신은 정치 혐의가 아니라 형사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재판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검사가 말을 하는 동안 저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제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수용 생활 중 처음으로 참지 못하고 오열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저는 검사에게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가 살아 있습니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검사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는 살아있고 건강합니다. 그는 모스크바에 있으며 해군 인민위원*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 해군 인민위원: 해군 최고위 직책.)
저는 쿠즈네초프에게도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하바롭스크에서 심문을 받을 때 수사관이 제게 질문했었습니다.
"쿠즈네초프가 정확히 왜 당신을 블류헤르의 부대로 보낸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아, 모른다고요! 그럼 제가 쿠즈네초프가 왜 당신을 블류헤르에게 보냈는지 알려드리죠."
수사관이 화를 내면서 저를 위협했습니다. 이 대화 후 저는 쿠즈네초프가 그의 전임자이자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빅토로프와 키레예프와 같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블라디보스톡 수용소에서 '수용소 통신'(도청)을 통해 블류헤르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더욱 강해졌습니다.
언급된 인물 모두 대숙청 때 사망했습니다.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1889-1938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빅토로프 1894-1938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키레예프 1890-1938
검사는 동정어린 눈으로 저를 지켜봤고 (검사는 제 동포였고 고향에서부터 저를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를 몰랐습니다) 끝으로 말했습니다.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감옥으로 돌아가서 2~3일 후에 있을 긍정적인 결과를 기다리십시오." 저는 자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방을 떠났습니다. 감옥에서 저는 동지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줬고 그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인민의 적'에 대한 대우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는 '수용소 통신' 소식의 확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석방에 대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5월 5일 정오에 저는 감방에서 끌려 나와 교도소장실로 끌려갔습니다. 소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가 맞습니까?"
"예."
"해군학교를 졸업했습니까?"
"예."
"감옥에 얼마나 있었습니까?"
"18개월 됐습니다."
"일이 무척 그리우시겠군요?"
"예."
"그럼 어디서 일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불편한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이것 좀 읽어보시죠." 그가 문서를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문서를 받아 읽었습니다.
~대충 석방한다는 문서 내용~
저를 유심히 지켜보던 교도소장이 물었습니다. "그럼, 질문은 없습니까?" 저는 여전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예, 질문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유를 얻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소장은 교도관을 소환하여 저를 가리키며 명령했습니다. "면도시키고, 씻기고, 잘 먹인 다음 수용소 밖으로 내보내게." 얼마 후 저는 쿠즈네초프의 사무실에 가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남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했습니다, "옐리세이, 자네가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불쌍한 니콜라이치크는 죽었네. 시간이 없었어. 지금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네. 얄타, 흑해 휴양지로 가서 좀 쉬게나. 거기서 감옥에서 얻은 병이 있는지 검사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치료받게. 모스크바로 돌아오면 우리는 자네의 발령지를 결정할 것이고, 지금 당장은 내 인사 담당관 이그나티예프에게 가게.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네."
저는 얄타로 갔고 의사들은 제 왼쪽 폐에서 결핵을 발견하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심문실에 끌려갈 때 '검은 까마귀'에 함께 있었던 한 동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저보다 먼저 감옥에서 나온 후 쿠즈네초프를 만나서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해줬습니다.
"니콜라이치크와 체르노쇼크가 죽은 것은 유감이야."
"체르노쇼크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불과 며칠 전에 그와 함께 심문을 받으러 갔었는데?"
"어디서? 그는 하바롭스크에 투옥되었지 않나."
"아니,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특수 수용소에 있네."
"그래서 하바롭스크에서 그를 찾지 못한 거군. 알았네!"
들은 바에 따르면 쿠즈네초프는 극동지역에서 '인민의 적' 사건을 조사하는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다고 합니다. 쿠즈네초프는 특수부 책임자 페트로프를 소환해 말했습니다.
"페트로프, 블라디보스톡 수용소에 E.A. 체르노쇼크가 수감되어 있네. 한 달 안에 그가 자네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서있게 하도록!"
이러한 방법으로 쿠즈네초프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원문
쿠즈네초프 전후 회고록에 헌정된 헌정글입니다.
https://coollib.com/b/264965/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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