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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회고록]

[번역/회고록] 쿠즈네초프 제독의 전후 회고록 (일부)

by 쿠악이 2023. 12. 12.

 

 

이 글은 쿠즈네초프의 전후 회고록 Крутые повороты 중 맨 끝부분의 일부만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글의 끝이 회고록의 끝입니다.)

오역,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글을 시작하기 앞서 사전에 알아두면 좋은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드립니다.

─ 첫 번째 불명예

스탈린과 꾸준히 언쟁을 벌여오던 쿠즈네초프는 1947년 1월 해군 총사련관직에서 해임당하고 2월에 해군 훈련 시설 국장으로 임명됩니다.

1948년 1월 12일, 쿠즈네초프는 다른 제독들(L.M. 갈레르, V.A. 알라푸조프, G.A. 스테파노프)과 함께 고보로프 원수 의장 아래 명예법원에 회부되었습니다. 42년~44년에 소련 정부의 허가 없이 낙하산 어뢰, 원격 수류탄, 여러 함포 시스템, 사격 통제 계획 등 다수의 도면과 기밀을 영국과 미국에 넘겼다는 혐의였습니다.

1948년 2월 2~3일 소련 대법원 군사 대학은 쿠즈네초프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그의 과거 공로들을 고려하여 형사 처벌을 하지 않는 대신 계급을 해군소장으로 강등시켰습니다. 같이 재판을 받은 갈레르는 징역 4년,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 후 쿠즈네초프는 태평양함대에서 복무하다가 1951년에 다시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모스크바로 불려옵니다.

─ 두 번째 불명예

1951년 재부임 이후 쿠즈네초프는 해군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흐루쇼프와 주코프와의 관계가 악화됩니다.

1955년 초, 쿠즈네초프는 심장마비를 겪고 1955년 5월 주코프에게 병가를 요청했습니다. 주코프에게서 대답은 없었지만 6월에 해군 총사령관 업무가 S.G. 고르시코프에게 맡겨집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쿠즈네초프는 전함 노보로시스크 폭발에 대한 책임으로 직위에서 해제됩니다. (전함 폭발은 1955년 10월 29일에 발생했으며 그때는 쿠즈네초프의 병가 기간이었습니다.)

1956년 2월 17일 쿠즈네초프는 강등당하고 해군에서 영원히 쫓겨납니다.

불합리한 폭정에 당한 쿠즈네초프 제독의 억울한 사연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소원하며 이 글을 소련 해군의 아버지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에게 바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나는 10개년 조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서 주요 군함 종류는 Ⓐ 항공모함(대형 및 경항모), Ⓑ 9인치 주포를 장착한 순양함(모든 적 순양함들에게 지지 않도록), Ⓒ 잠수함, Ⓓ 구축함 등으로 구성되었다.

논의 과정에서 일어난 논쟁은 주로 항공모함에 관한 것이었고 순양함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구축함에 관해서는 말이 많았는데 나는 함포가 부족한 구형의 프로젝트 30형 구축함의 대량 건조를 강력히 반대했고, 조선 산업의 부흥과 인력 확보를 위해 소량의 건조에만 동의했다. 잠수함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잠수함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12인치 포를 갖춘 중순양함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았지만 내 기억으론 국방부가 여러 번 12인치 포를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새로운 건조 계획에 대한 논의가 한창일 때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결국 계획은 나 없이 최종 채택되었다. 이는 관련 문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전후 조선사업 계획에 실수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중순양함 건조 결정, 프로젝트 30형 구축함의 대량 건조, 오래된 프로젝트 15형 잠수함 건조 유지 및 기타 수많은 문제들이 그러했다. 특히 프로젝트 30형 구축함의 낮은 성능에는 많은 서신이 있었고 함대에 상륙정과 항공모함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보고가 있었다.

나는 해군장관으로 복귀한 직후인 1951년 9월 1일에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낡은 함정들의 목록을 적고 이것들에 대해 몇 가지 긴급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냈다.

따라서 1947년에서 1951년 사이에 건조된 함선들의 품질에 대해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나를 비난할 수는 없다. 전후 조선 계획은 나 없이, 나의 제안과 의견에 반하여 채택되었고, 이 함선들의 건조도 대부분 내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내 시선이 제일 옳고 정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1952-1953년까지 우리 해군은 항공모함, 잠수함, 상륙함, 순양함 및 대공력이 강한 현대적인 구축함들을 보유하게 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내 제안을 토대로 새로운 기술을 설계하기도 했었다.

스탈린이 로켓미사일 무기에 대해 논의했을 때 나는 해군들을 위한 해안 버전 시제품을 가능한 한 빨리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군의 로켓미사일 무기에 관한 것은 내가 1951년에 처음으로 제기했다. 1954-1955년에 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와 해안 방어선에서 이 새로운 무기의 프로토타입이 설치됐으며 해안용 '스트렐라'는 이미 테스트 발사를 완료했었다. 나는 1955년에 크림에서 흐루쇼프에게 미사일 발사를 보여주었고 이 방향의 모든 초안 결정을 제시했다.

이 사실들을 얘기하는 것은 주코프와 흐루쇼프가 나를 '후진적인' 사람으로 비방한 것에 대해 반박하기 위함이다.

1951년 모스크바에 재발령 된 후, 나는 각 부서의 도움을 받아 각료회의 의장에게 보낼 구식 장비와 모든 결함에 대한 대규모 보고서를 공들여 준비했다. 내 선에서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당의 처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문서 외에는 스탈린에게 보고 할 방법이 없었고 그와 개인적인 만남을 약속할 수도 없었다. 힘들게 준비한 이 보고서에는 바로잡아야 할 주요 결함들이 자세히 쓰여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나에 대한 모욕적인 공격과 내가 '괜히 문제없는 현대적인 함선들을 비판하는 자'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말리셰프가 당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최첨단인 우리 함선들을 오판하고 까내리고 있다.' 라는 반국가적 혐의로 거의 고발을 당했다. (이 문제는 결의안을 통해 해결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생각한 나는 1953년 8월 6일에 국방부 장관 불가닌에게 해군의 임무에 대한 내 견해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썼다. 나는 내 보고서가 절대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참모부에 토론할 만한 문제들을 분류하고 준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 모든 걸 한 이유는 앞으로 함대를 어떻게 건설해가야 할지 결정하려면 군대 시스템 내에서 그들의 역할과 전쟁시 수행할 임무를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들 없이는 무엇을 건조해야 할지 제안하기란 힘들었다.

그러나 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건조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명령만이 돌아왔다. 계획을 제출하면 총참모부에서 검토하느라 반환되었고 계속해서 시간이 낭비되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건조 계획의 문제점들은 이전 계획들의 실수보다 더 중요하고 내 실책의 주요 혐의점이었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1954년 3월 31일에 나는 조선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이 보고서가 완벽하지 않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상보다 더 많은 함선들이 계획되었고 최신형 함종들과 기계들을 개발할 것을 요구하는 부분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최종 제출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싶다.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명령과 함께 나는 기본적인 조건은 조선산업부와 조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선산업부가 제안한 기한은 비현실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준수하지 않고 최대한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이 계획에 모든 최신 함선들의 요구 사항이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관련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건조는 미루어졌다.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한은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내가 그토록 반대하던 오래된 함종들도 건조 목록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인정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동안 배 없이 방치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 이 점에 대해 나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나는 제시간에 계획을 수정했고 이로 인해 어떠한 물질적 피해도 초래하지 않았다.

건조 계획의 초안이 준비되어 불가닌 국방장관에게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바실렙스키, 소콜롭스키 참모총장, 주코프의 의무적 참여하에 계획에 대해 다시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의 완전한 동의를 받아내고 장관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회의가 열렸고 나는 그들이 제안한 모든 변경 사항에 대해 동의했다. 특히 주코프는 항공모함과 상륙정의 대폭적인 감축을 요구했는데,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것도 역시 동의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충분히 합의를 보고 국방장관, 총참모장, 나의 최종 서명을 받았다. 나는 서명하고 승인한 사람들에게 함께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단지 이 문제를 보다 객관적이고 명확히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엔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기존 계획에 따라 건조가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설계 측면에서 추가 보강이 필요했기 때문에(향후 함선 품질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중요함) 나는 최대한 새로 만든 계획이 빨리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계획서가 중앙위원회에 보내져 사전 검토가 이루어졌고 첫 번째 심의 과정에서 사소한 수정이 이루어졌으며 며칠 후 소련 최고회의에서 논의될 예정이었다.

나는 결의안 초안을 준비하고 위원회를 구성해 2~3개월 동안 계획에 대해 더 자세히 논의하고 업계와 조율해 어떤 함선을 어느 기간 내에 건조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지시했다. (이 결의안은 보존되어 있다.) 나는 이런 중대한 결정들이 성급하게 내려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안은 없었다.

회의에서 계획 검토와 위원회 설립이 또다시 연기되었을 때 내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최종 결정까지 아직 많은 검토가 필요했고 이제 아까운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미루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러한 신경쇠약은 전에 없던 것이었고 완벽히 무의식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였는지를 대변한다. 나는 전시상황에도 소리를 지르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고 이는 내 해군 전우들이 보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지금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이 해마다 어떻게 연기되었는지, 소련 최고회의에서 이 문제를 무기한 연기해야 한다는 주코프와 흐루쇼프의 의견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을지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하던 위원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상황에서 '분노로 울부짖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나의 잘못을 숨기지 않으면서 얘기하고 싶었던 사실들이다.

위에서 답변한 나에 대한 공식적인 실책 혐의 외에도 내가 비난을 받았던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한다.

1. 국방부 조직 개편에 대해. 사람들은 내가 해군 부서의 특별한 독립을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군 조직 개편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은 해군 총사령관의 법적 지위를 장관급과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두 번의 시도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46년에 우리 해군 인민위원회가 폐지되고 내가 국방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을 때이다. 불확실한 직무와 정확히 규정된 법적 지위의 부재로 인해 모든 해군 문제의 실제 책임자는 총참모부와 인민위원회의 여러 부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일어났느냐. 해군에 대한 보고서를 받은 국방 인민위원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고서는 검토를 위해 다른 부서로 보내졌다. 그렇게 보고서는 오랫동안 정처 없이 떠돌다가 다시 인민위원에게 돌아왔다. 또한 이 인민위원회는 지상군을 담당하는 동지들이 이끌었기 때문에 다분히 육군 편향적이었다. 인사 및 보급에 대해 결정하는 총참모부도 마찬가지였다. 전 해군 인민위원이었던 나는 새로운 국방부에 자연스럽게가 아닌 어떠한 불순물처럼 들어왔으며, 모두가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우리 해군의 요구 사항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1946-1947년에 스탈린은 형식적인 국방 인민위원일 뿐이었고 실제로 모든 문제는 육군에 편향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던 불가닌이 처리했다. 1947년 1월에 나는 다른 부서로 전근을 갔다. 이전엔 내가 조직의 장애물에 불과했지만 이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전 조직에서는 군사 내에서 해군의 역할과 중요성을 낮추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새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산, 함선, 장비에 관한 모든 신청이 얼마나 빠르게 삭감되는지, 이미 승인된 예산마저도 삭감되는 걸 지켜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대조국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체계 대신 해군 문제를 육군 기관이 분할해서 지배하는 체계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는 군대 전체의 개선이 아니라 육군의 구질서가 보존되고 해군이 이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전쟁 경험은 모든 군사 부문의 기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자산과 인력을 정확하게 분배해 줄 객관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는 모든 군사 부문이 동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해군과 신무기 개발 중에선 신무기에 우선권을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해군보다 훨씬 더 구식인 육군에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해군은 아무런 설명이나 이유 없이 배제되었다.

1947년에 뜻밖이고 예상치 못한 조직 개편이 발생한 것처럼, 1951년에는 부처 간의 분리가 이루어져 해군은 사실상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 조직 개편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전쟁을 통해 배운 군사 운영 방식 및 현대 전투 수단을 관리하는 새로운 접근에 대한 모든 것들이 버려졌다.

1951년에 두 개의 부처가 거의 1938-1939년의 전쟁 전 때와 별다름없이 재조직되었으며, 정부의 조정 없이 두 부처는 전간기 시절의 모든 실수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실제 군을 책임 지던 건 불가닌이었고, 그는 충분히 열악한 상황의 조직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예전부터 해군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며, 나의 해군장관 임명도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가진 해군에 대한 혐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일도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에게 도착한 서류들은 관료적 결정으로 가득 찬 그의 선에서 사라져갔다. 서류에는 '검토하겠다', '보고하겠다', '말리셰프에게 의견을 요청하겠다'와 같은 형식적인 결정만이 담겨 있었다.

이 시기에 '중앙기구 마비'는 국가 기관 전체에서 정점에 도달하며 국가 업무에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후된 장비에 대규모 지출을 하면서 돈을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나는 현재 시스템이 국가에 미치는 모든 피해를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로 인해 개인적으로 정치적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더욱 최악인 것은 이 외침조차도 사실상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던 늙고 쇠약해진 스탈린의 귀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정당한 일 처리 대신 행해지던 불가닌의 정치적인 일 처리들은 해군에 가장 큰 피해를 끼쳤다. (다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 주장, 노력은 불가닌의 분노를 일으켰고 쌓여가던 분노는 그가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은 잠깐 제쳐두고 당면했던 문제로 돌아가자.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군대의 급격한 재편이 이루어졌다. 국방부의 통합으로 해군장관은 국방부 차관이 되었는데 권한은 축소되어 공식적으로 해군에 속하지도 않았고 차관으로서 그저 명령을 내릴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정계에서의 입지는 더욱 불확실해졌다. 우리 해군들과 분쟁이 많은 장관들(조선, 군비 등)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이 발생하면 국방부 장관에게 가서 해결책을 찾곤 했다. 새로운 부처 내외부에서 모든 문제들이 이렇게 처리되었다.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형식적인 일이었나? 아니,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조직은 모든 사람의 권리를 재검토하고 전쟁 경험을 토대로 그들에게 맞는 새로운 위치를 찾아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전쟁의 교훈을 고려하며 해군이 새로운 부처에서 국가의 일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자리 잡을 수 있는 형태를 찾아냈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두 번 보고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문제들의 처리가 지연되고 있었고 해군차관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내는 중요한 보고서의 운명은 대령이나 해군대령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국방부 장관은 대개 자신의 부서의 의견을 고려하고 이를 기반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46년 1월 12일, 대조국전쟁이 끝난 직후 나는 전쟁 기록들을 연구한 뒤 모든 군사 부문은 하나의 통합된 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서기장 동지에게 보고했다. 나는 이 관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1953년에 다시 한번 보고서의 사본을 제출했다. 군사 통합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나는 여전히 국방부 조직에 관한 여러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내 의견을 요약해 말하자면, 나라가 전시상황일 때 국방부는 순전히 군사 문제를 집행하는 기관에 불과해야 한다. 국방부 장관은 모든 군사 부문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 될 수 없으며, 이것은 새로운 국방부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 국방부 장관이 모든 권한을 자신이 통제하려는 해로운 욕심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방부가 아닌 지도자가 이끄는 최고 기구가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국가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작전계획의 통일성과 대부분의 작전이 모든 군대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군부의 적절한 독립성을 빼앗고 작전기구를 박탈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장관과 참모부만으로는 전쟁을 이끌 수 없다. 다수의 작전은 최고 사령관에게 위임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가 말한 통합 조직 시스템과 지금의 시스템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국가에 도움 안 되는) 해군의 독립성을 고집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2. 개전 당시 상황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며칠 안에 방어를 위해 부대를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주장한 주코프의 진술을 반박하고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전쟁 전 한 달 동안 함대는 서서히 작전 준비 태세에 들어갔고 적시에 전화를 걸어 암호를 전달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숙지하고 있었다.

12시에(1941.6.22 0시) 나는 이미 모든 함대로부터 전투 준비 태세 보고를 받았다. 이것을 왜 이토록 중요시했냐면 개전 초기에 파괴된 함대는 이후 전쟁 중에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전쟁초에 벌어진 일들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는 권위 높은 자리에서 매우 상세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주코프가 나에게 제기한 혐의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서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 명시한 내 관점은 위와 같았다.

서한에 답신은 없었다.

1964년에 내 사건에 대한 결정이 나를 배제하고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련 원수 자하로프가 결론을 준비하도록 배정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나는 그에게 연락해 나를 다시 받아주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결정이 어떤 문서를 기반으로 작성되는지 확인하고자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나를 배제하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법에 따라 해군 총사령관 고르시코프 제독을 통해 국방부 장관에게 요구사항을 전하고 당원으로서 중앙위원회에 호소했다.

아무도 나와 얘기할 시간이 없나? 아무도 없었다. 보낸 편지들엔 답이 오지 않았고 사무국에 두 번이나 전화를 걸고서야 이 이상 강력히 요구하는 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당원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됐지만 나를 싫어하는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은 상황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지도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다...

1968년 정부 법령에 따라 소련 영웅들의 연금이 개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고르시코프에게 전화했고 그는 요청서를 발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안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5월에 국방 장관인 그레치코가 연금 인상을 요청하는 서신을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먼저 당신이 가진 징계를 해결해야 합니다." 중앙위원회 행정부 관리인 사빈킨이 내게 말했다. "저는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한번 보죠." 라고 그는 결론을 짓고서는 떠나버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사빈킨과 그레치코 원수에게 나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를 배제하고 모든 일이 결정됐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1956년에 국방장관 주코프에게 나의 개인적인 문제와 해군의 문제들에 대해 대화를 요청했던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1957년에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더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던 내용도 포함했다. 나는 당시 흐루쇼프, 주코프, 말리놉스키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사건을 재조사하고 나를 다시 받아달라는 요청을 했었는데 오직 말리놉스키만이 내 사건은 최고기관에 의해 결정됐기 때문에 사건에 연관되기 싫다는 대답을 해줬다. "어째서인지 흐루쇼프가 당신에게 화가 많이 났습니다." 말리놉스키가 말했었다.

그다음 나는 그레치코에게 어떤 징계도 고지 받지 못했으며 벌금이 부과되었는지 안내받지 못했다는 편지를 썼다.

6월 25일에 나는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어 행정부에서 해군 업무를 담당하는 우스코프를 만났다. 사빈킨을 기다리는 동안 그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그러한 결과가 내려져선 안됐다고 이해하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서 결정한 거겠죠." 그가 내 문제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나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의 관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그곳'이라는 단어가 깊은 대화를 방해했다.

사빈킨의 차갑고 딱딱한 응대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고 그의 아까운 시간을 오래 붙잡고 있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그는 1956년 2월에 나에게 내려진 판결을 보여줬지만 그 판결이 내려진 근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상위 기관의 결정'이라며 거부했다. 나는 다른 것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 문제가 되는 '징계'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그레치코와 에피셰프)에 편지를 쓰십시오."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상위 기관'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확실히 사건에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후, 나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6월 26일에 나는 그레치코와 에피셰프에게 징계 해제에 대해 말하면서 내 요청을 지지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결정에 따라 나에게 징계가 내려진 이유 중 하나는 해군 발전에 대한 '잘못된 견해'였다. 그러나 이 죄를 증명하는 어떠한 증거도 판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전쟁을 대비하고 인민위원이자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해군을 지도했으며, 전후에 여러 번 중앙위원회와 각료위원회에 내 견해에 대해 보고하면서 내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한 나는 내 해임 결정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나 없이 이 모든 판결이 이루어지고 죄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점은 절대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의견을 1969년 3월 31일에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 적었다. 판결의 근거가 된 문서들이 있다면, 나는 사실적인 자료로 그것들을 반박하면서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만약 중앙위원회가 이 문제를 다시 다루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을 테니 그저 알려만 달라고 요청했다. 이 편지는 펠셰에게 전달되었고 답신은 없었다...

결국 내게 내려진 징계는 해제되었고 나는 펠셰에게 내 사건을 재조사하거나 적어도 판결의 근거가 된 자료를 요청하는 짧은 편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만약 내가 이 사건을 계속 고집한다면 징계 해제를 무효화하고 연금 인상 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깊이 생각한 후, 나는 이것으로 모든 걸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 높은 계급을 한 번에 박탈 시킬 수 있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주코프가 제시한 사실들은 쉽게 반박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국가와 당은 내 의견도 듣지 않고 내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판결을 내렸는데 이러한 것이 어떻게 합법일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의견을 1957년에 정치국에 보내는 서한에 작성했고 불법적인 재판을 취소하고 모든 법을 지키면서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당원이 나에게 그가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다면, 나는 곧바로 그건 잘못되었다고, 그러한 판결은 무효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만약 부하가 나에게 계급을 박탈당했는데 혐의에 대한 증거도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면 나는 그런 것은 불법이며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누가 내 사건에 대해 "들쑤시지 말라"는 말을 처음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것에 대해 쓰는 이유는 내 직위 복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해군의 여러 곳과 상부에서 "들쑤시지 말라"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말의 의미와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의 복권과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면 그들은 "귀찮게 하지말라"고 답한다. 당의 법과 규정을 모두 어긴 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강등당한 누군가를 위해 사건의 진실을 알려고 하면(실제로 이런 시도가 많았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써준 편지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파헤치지 말라"고 말한다.

“들쑤시지 말라”는 말은 나에 대해 별다른 주장이 없다는 것을 뜻하며, 나쁘게 말하자면 '들쑤시면'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괜히 자극하지 마세요”라고 내게 충고하는 사람들은 얼핏 보면 나를 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헛된 벌을 받은 건지, 아니면 더 받아야 하는지 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은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린 저축한 돈이 없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내 다차를 짓고 싶지 않았다. 학생인 두 아들은 여전히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했다. 회고록을 쓸 생각을 했지만 빠른 재정적 이득이 보장되지 않았고, 애초에 회고록은 해군의 전투 활동에 대해서, 나 외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나는 무사히 연금(300루블)을 받았지만 따로 노동을 하면서 추가적인 수입을 벌 수 없었다. 모두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 당시에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국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1년 후에는 국방부 군사 잡지의 기사를 번역할 수 있었다. 한 페이지당 60루블을 받는 어려운 번역 작업은 많은 노력과 큰 집중력을 요구했고, 1956년에 '두 번째 충격'을 겪은 후 건강 회복이 필요한 시기에도 일해야 했다. 마이스키가 '니콜라예프'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 관한 기사를 쓰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단지 (그렇게 많지 않은) 금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나에게 회고록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글쓰기로 해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흐루쇼프가 내 주위에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에 나는 더 좋은 시기를 기다리며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책이 거의 완성되었지만 흐루쇼프가 왕좌에 굳건히 앉아있어 상황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전 모스크바 위원장 타라소프를 만났을 때 그는 방금 경찰로부터 들은 소식을 말해줬다. "오늘 아침에 흐루쇼프의 초상화들이 치워졌다는군요." 나는 놀랐고 심지어 믿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흐루쇼프에 대해 객관적으로 글을 쓰기란 어렵다. 그는 나에 대해 알지 못하고 해군에 관해 한번도 나와 이야기하지 않았으면서 수십 번이나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야 할 높은 지위에 있었다.

나는 그 해에 제독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들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갖고 비판할 권리가 있지만, 그런 '가벼운' 방식으로 사소하고 확인되지 않은 얘기까지 퍼트리고 다니는 것은 국가 지도자가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동조자임을 잘 알고 있고, 그가 세로프와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탄압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연히 세로프가 자신의 활동과 관련된 문서를 파기하라고 한 흐루쇼프를 비난하는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아직까지 흐루쇼프의 속임수를 숨겨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관주의나 주의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모험주의 말이다. 어떤 고차원적인 이유가 이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역사는 한 번에 쓰이지 않는다!..

지도부가 흐루쇼프를 정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스탈린의 인격 숭배가 폭로된 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선거, 집체적 지도. 그러나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뒤를 따라 똑같은 독재의 길을 걸었다. 스탈린 숭배는 새로운 숭배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흐루쇼프는 (누군가가 제안한)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열심히 잘못된 결정을 파멸적인 결과로 이끌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노력했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나는 이 업계의 비극적인 상황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1958년부터 개선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쇠퇴하고 있었다.

학교와 부처 해체에 대한 조치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교 정책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의 유명한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발언은 부적절한 언사의 대표이며, UN 총회에서 그가 부츠를 벗고 탁자를 치는 행동을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치에서 이런 코미디를 벌이는 것은 분명 용납될 수 없다.

그의 부실한 방식은 때때로 국가를 전쟁 위기에 몰아넣었다. 쿠바에 미사일을 공급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우리는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고려하면서 한 국가를 지지하거나 옹호할 때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실제 수단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책은 순수한 모험주의일 뿐이다. 베를린 봉쇄를 떠올려보라!

중국과 알바니아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마오쩌둥과 호샤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은 소련 정치가에게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모든 것이 더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도 아첨꾼이 줄어들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야망이 적어졌으면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권위에 악영향을 미치고 사회주의 국가의 당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할 것이다. 그래도 어려움을 견디고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흐루쇼프 숭배가 구체화되던 시기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 숭배가 막 끝났는데 어떻게 새로운 숭배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주제는 은밀하게 논의되었고, 다양한 회의와 보고서에서 '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익명의 메모가 제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루쇼프는 더욱 무례해지고 그의 개인숭배는 두드러져 갔다. 흐루쇼프를 찬양하는 기사와 장황한 연설들로 정상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나날이 어려워져갔다. 합리적인 견해들이 흐루쇼프의 천재성을 칭찬하는 노래의 홍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우리 흐루쇼프 동지는 아름답게 노래할 수도 있다는군요." 한번은 저명한 과학자 동지가 내게 아주 진지하고 부끄러움 없이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 '친애하는'이 붙는 건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흐루쇼프가 강단에서 외치는 강력한 목소리는 일시적으로 모든 이성적인 생각을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숙취는 조만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엄청난 에너지, 천부적인 지능과 재치를 가지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얘기들을 알고, 살아온 세월에서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더 알아야 했다. 그가 하는 주장들이 거대했던 만큼...

어느 날 B동지가 '높은 연단'에 보내려는 글을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그가 다양한 기관에 글을 써 보내는 '삼류 작가'로 알려져 있고 그의 글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과 글은 적절하게 사용될 때 많은 무게를 얻는다. 신문에 쓰여있는 (코끼리를 포장할 수 있을 정도로 긴)장황한 글은 읽혀지지 않고 그런 글을 매일 보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 동지를 약간 불신하면서 물었다. "무엇에 대해 쓴 건가?" "위선에 대해서요..." 그는 글의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흥미가 생겼다. 그는 위선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했고 불행히도 우리나라에 위선이 많아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상부에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위선이라고 주장했다. 대담하게 썼다고 생각하며 감탄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이 동지가 정직하고 솔직하며 용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그에 대해 들은 소식은 산업과 농업 지역 위원회가 분리됐을 때 그가 '공개적으로, 솔직하고 강력한' 글을 작성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얘기를 전해준 사람이 농담처럼 덧붙였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얘기해 줄 수 있었을까? 본질적으로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조언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지만, 동시에 조언이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중간을 택했다. "이런 주제는 논의되어야 마땅하지만, 여기에 쓰인 모든 비판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그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며칠 후 그 글을 그대로 보냈다. 내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그는 마음속으로 나를 위선자라고 불렀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직, 잘못에 대한 회피, 뇌물 같은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에서 몇 가지 새로운 생각들이 피어났고, 이제 그 생각을 종이에 옮기고 싶다.

"아, 우리 모두가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한다면 다 같이 훨씬 잘 살 수 있었을 텐데요."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같은 생각을 하며 토론을 해나갔다. 결말 중 하나는 대가를 치르고 컬트적 숭배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흐루쇼프가 그러했다.)

"뇌물이 돈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까?" B와 얘기하는 도중 한 동지가 얘기해 준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돈으로 뇌물을 받는 것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고 10원이든 1000원이든 모두 강력하게 비난하죠. 상관에게 잘 보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로운 관점을 지지하는 것도 부하가 상관에게 주는 일종의 뇌물이 아닙니까?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뇌물이고 주는 사람의 지갑이 아닌 공익을 희생합니다." 한 가지 사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흐루쇼프는 일반적으로 수상 함대의 역할과 특히 순양함의 역할에 대해 완전히 어리석고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을 주장했다. 모든 전문가들의 의무는 무능한 상급자를 설득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심각한 물질적, 도덕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뇌물'을 바치는 걸 선택했다. 흐루쇼프가 네바 강에서 배를 타면서 "순양함은 없애야 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맞습니다, 없애야 합니다." 그들은 흐루쇼프에게 '뇌물'을 건넸다. "잠수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 흐루쇼프가 선언하며 다른 함종들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잠수함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국민의 종'으로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 '뇌물'을 바치며 동조했다.

억압의 시대와 스탈린의 인격 숭배를 예로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양심을 달랬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 억압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뇌물'을 받았나? 이 무슨 위선들인가! 스탈린만 비난하는 것은 죽은 꽃을 치우면서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물을 주면 다시 가시가 무성한 꽃이 피어날 것이다. 단순히 흐루쇼프의 기분에 따라 사람들이 해고되거나 쫓겨난다면, 스탈린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자네는 심장마비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야." 한 친구가 내 병을 축복이라고 표현하며 슬프게 말했다. "그건 모두 '친애하는'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에게 달려있네." 당시 한 상급자가 내게 말했었고 나는 그가 이미 흐루쇼프에게 '뇌물'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 나는 흐루쇼프를 꼬박꼬박 '친애하는'이라고 불렀던 그 동지가 그에게 뇌물을 너무 많이 바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도덕적 짐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1939년) 대숙청으로 유명을 달리한 전 흑해함대 사령관 코자노프가 적이 아니었다는 보로실로프의 솔직한 고백에 매우 놀랐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의 양심에는 수백 명의 코자노프가 있다... 제때 뽑히지 않은 뿌리는 나중에 열매를 맺었다. 보로실로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흐루쇼프에게 키스를 했고,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서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단순한 뇌물에 비교될 수 있나? 어쨌든 본질은 동일하다.

이제 위선은 우리 일상에 만연하고 대중적인 현상이다. 내가 해임되고 재판을 받고 복직했다가 다시 해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왜 흐루쇼프와 싸웠냐면서 나를 비난했다.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금부터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조언해 주면서 위선자가 되고 거짓말을 하라고 말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이 맞다고 하겠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디 가서 이 진실들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경고할 것이다...

흐루쇼프의 해임은 폭탄이 아닌 조용히 터지는 풍선처럼 천천히 진행됐다. 나는 누구보다 더 환호하고 복수에 후련해 하면서 기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는 이미 사건들을 조금 떨어져서 보고 평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제 열흘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과 견해를 들었다.

항상 그렇듯이 어제까지만 해도 흐루쇼프를 찬양하던 아첨꾼들은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고 "그를 처단하라!"라고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들은 이제 흐루쇼프의 무대를 끝내고 다음 무대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다.

정치적으로 흐루쇼프와 관련이 없는 차분하고 합리적인 동지들은 이제 흐루쇼프의 다음은 누구일지, 국가의 운명을 생각하고 사실을 평가하고 결과를 예견하려고 노력했다.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불만이 많고 과할 정도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흐루쇼프의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항상 그를 복잡하고 위험한 인물로 생각해 왔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와 추진력은 모험주의와 권력욕으로 이어졌다. 달콤한 권력이 그를 취하게 했다. 그는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했고 추구하는 이데올로기가 없었다. 악의와 무례함은 그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주변은 아첨꾼들로 가득해서 더 이상 상식은 그에게 전달될 수 없었다. 그는 위험한 도박꾼처럼 독재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큰 돈을 배팅하고 이기면서 균형을 잃은 그는 더 이상 발밑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모험주의와 자신은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국가의 운명을 위험에 빠트렸고, 다행스럽게도 상대방의 현명함이 위태로운 사태의 발전을 멈추게 했다. 결과적으로 우린 명성을 잃고 돈만 낭비했다.

이 모든 것은 흐루쇼프가 자신의 위치에 걸맞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한 번의 실수는 실수지만, 실수가 반복되면 그것은 범죄다. 같은 실수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그의 자리는 더욱 차분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사람들에게 양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들로부터 공정하게 평가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흐루쇼프가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짧은 시간 만에 사실상 독재자가 될 수 있었는지, 대중의 동의와 자세한 설명도 없이 외국에 그런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숭배'가 빠르게 자라나는 토양을 바꾸지 않고 악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악의 뿌리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강력한 법률, 헌법 규정 및 그들의 이행을 감독하는 기능의 부재이다. 엄청난 권력이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특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국가는 권력을 한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능한 한 많은 기관과 개인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어야 한다.

가장 큰 결점은 국가 기관과 당 기관의 기능이 혼동되고, 더 나아가 국가 기관이 당 기관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권력은 어떻게든 힘을 잃었다. 누구도 지방행정기관을 찾지 않고 지방 당 위원회에 간다. 모든 도시와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쿠데타가 무조건 좋은 것일까? 쿠데타는 사람들이 국가 통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나는 쿠데타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전복시키는 것을 이해한다. 예를 들자면, 영국 여왕을 전복시킬 필요는 없다. 공식적인 퇴진이 있어야 한다. 일부 남미 국가에서 전 독재자가 하룻밤 사이에 다른 독재자로 교체된다면, 그건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파벌일 뿐임을 의미하며,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숭배를 폭로할 때 가장 열렬히 숭배한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서 책임을 면제시킬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한 숭배에서 다른 숭배로 옮겨갈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흐루쇼프는 학교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이제 당시 학교를 책임 지던 사람은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전부 흐루쇼프 잘못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끌어내 바지를 벗기고 때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서 너는? 넌 어딨었는데?!" 이것은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신념 없이 어리석은 일을 계속 따를 것이다. 그의 의무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거나 책임지고 떠나는 것임에도 말이다.

다차 이웃인 톨로코니코프가 국방부의 움직임에 대해 얘기해 줬다. 흐루쇼프에게 매우 적대적인 분위기였고 마트베이 자하로프가 총회에서 아주 신랄한 연설을 했다. 그레치코와 예레멘코의 발언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특히 예레멘코. 수치심도 없는 사람들! 어제까지만 해도 정치국에 빌붙어 흐루쇼프를 찬양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가장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양심, 자신의 생각, 명예는 어디 있는가? 그들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라는 게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해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고르시코프는 가슴을 치며 자신은 해군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흐루쇼프가 순양함을 없애버렸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르시코프가 그 모든 걸 묵인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흐루쇼프에게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문서나 요청서는 대체 어디 있나? 항상 '죽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며 살아갈 것인가? 결국 순양함을 없앤 건 고르시코프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게 '상부'의 잘못이면 대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동지들의 책임은 어디 있는 건가?!

오늘엔 모든 것을 흐루쇼프의 탓으로 돌리고, 자아 없이 내일은 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책임감 없는 사람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마치 회전목마와 같다!

남들보다 높은 급여, 다차 등을 제공받는 대가로 지녀야 하는 책임은 대체 어디 있는 건가? 해결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하고, 못하겠으면 사임해야 한다!

이번 일로 인한 특정 사람들의 행동은 웃음밖에 안 나왔다. 어제만 해도 그들은 "흐루쇼프는 잘 하고 있다."라며 그를 찬양했다. 어제만 해도 나와 통화하고 대화하는 것을 피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상황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내게 전화해서 우정을 맹세하고 아부하면서 정보를 공유하길 원했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타락시켰나? 아 동지들이여, 국민들이여!

나는 흐루쇼프와의 논쟁에서 결국 내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받아 큰 도덕적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무엇보다도 분노했던 건 흐루쇼프와 그를 따르는 일부 군 지휘관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핵잠수함과 미사일 무장을 과소평가했다는 거짓된 비난을 쏟아낼 때였다.

어리석은 말이다! 내가 제시한 건조 계획을 보면 실제 취역한 핵잠수함보다 더 많은 양의 핵잠수함을 제시하고 있었다. 애초에 핵잠수함 건조는 내 시기에 시작되었다. 나는 말리셰프, 즈베냐긴과 다른 동지들과 함께 핵잠의 첫 설계를 검토했었다. 이 분야에서 아무도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않았다. 미사일의 중요성은 내 재임 기간 때 이미 이해되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잘못된 주장을 할 뿐만 아니라 함대 건설에 대한 나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망발을 늘여놓았다. 그는 나와 한 번도 얘기해 보지 않고 내가 해군의 미래에 대해 해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모함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1973년), 다양한 함종들을 주장한 나의 견해는 입증되었다. 잠수함과 수상함을 두루 갖춘 '균형 잡힌' 해군은 현재 가장 이상적인 선택으로 인정받고 있다. 잠수함이 모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 수상함은 필요 없으며 항공모함은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흐루쇼프의 주장이 많은 해군 전문가들에게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흐루쇼프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순양함을 파기하는 것에 반대한 나를 비난했다. 그는 한 번 레닌그라드를 방문하여 배를 타고 조선소를 지날 때, 아직 분해되지 않은 순양함의 몸체를 가리키며 "여기 있는 건 쿠즈네초프의 배들인가?"라고 물었다고 바이코프가 말해줬다. 그때 바이코프는 반문하지 않고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후회했다. 순양함들은 곧 분해되었고 당시 '프라우다' 신문에는 노동자들이 그 작업을 완수하게 되어 얼마나 행복해했는지에 대한 기사까지 실렸었다. 흐루쇼프는 순양함부터 시작해서 일반적인 수상함, 특히 크기가 큰 함선을 비난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항공모함에 대해서 집요하게 나를 꾸짖었다.

내가 중형 항공모함을 지지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항공모함이 불필요한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완전한 비핵화를 믿지 않고, 두 진영의 특성으로 인해 충분히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나에 대한 결점을 찾지 못한 흐루쇼프는 흥분하면서 단순히 내가 감히 '내 의견을 가지고' 그를 반대했다고 비난했다. 흐루쇼프! 그의 오만함과 자만은 절정이었고 아무도 그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흐루쇼프의 말에 동의하며 항공모함이 '죽은 것'이라고 표현한 이사코프의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경험이 풍부하고 수많은 작전들을 수행한 제독이 그렇게 말하는 건 양심을 팔아치우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이사코프를 충성스럽고 유능한 제독으로 평가했다...

나는 이런 기민한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에 적응한 뒤 또다시 이익을 거두지 않을까 두렵다. 예를 들어 고르시코프는 이미 가슴을 치며 자신이 흐루쇼프와 맞서 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정직하고 부도덕한 행동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모든 것이 그저 '자리를 교체하는 것'으로 끝날까...

지금까지(1973년 5월) 아무도 내게 해임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고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계급이나 직책에 관심이 없다. 나는 이제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판결의 근거가 된 문서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아무도 답장해 주지 않은 것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증거 없이 그저 흐루쇼프의 말 하나 때문에 진행된 것 같지 않은가? 또한 해군 동지들이 내가 보낸 편지의 답으로 내가 해군의 미래를 잘못 그리고 있었다고 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러다가 내가 죽은 후 계급이 복권되는 대신 나에 대한 잘못된 헛소문이 퍼지고 내가 전쟁 동안 한 일들이 지워질까 두렵다.

직장이나 생활에서의 작은 변화가 사람에게 큰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고, 동시에 전체 신경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1947년에 일어난 재판을 이겨내기란 어려웠다. 그 사건은 당국이 제독과 같은 지위 높은 장군들을 언제든 벌할 수 있음을 알리는 교육적인 자리였다. 정말로, 실체는 그러했다...

'보복의 칼날'이 우리 머리 위에 내려쳐질 준비를 하는 3주 동안의 불안한 시간은 내 신경계에 큰 부담을 주었다. 법원 건물에서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심장이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전에 어떠한 병도 앓아본 적 없던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몸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로 이런 증상들이 점점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극복했다. 철학적으로 사건들을 바라보고 일에 몰두하며 우울증에 빠지거나 술에 의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 무죄를 증명하고 복권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생존해야 했다. 나는 태평양함대에서 완전히 회복했다.

1951년 여름, 해군 장관으로 재임명되었을 때 걱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기분 좋은 긍정적인 감정들이 더 많았다. 나는 곧바로 곤경에 처한 전우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두 통의 편지를 썼다. 나중에 재판으로 인해 징역을 선고받았던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는 내가 한 조치들에 관해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독방에서 일반 감옥으로 옮겨갔을 때 제일 안도했다고 말했다. "몇 년 동안 독방에 갇혀있으면 다른 범죄자들과 함께 앉아있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알라푸조프는 감방 동지들의 자문 역할을 해줬고 그들은 기꺼이 그를 위해 바닥을 닦아줬다고 했다. "상황이 슬프지만 않았다면 웃긴 얘기였을 거야." 나는 마침내 내 집에 다 같이 함께 모였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을 잘 배웅한 뒤, 어떠한 우울함이 나를 괴롭혔다. 마치 내가 무언가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편지나 대화로 내가 한 과감한 행동들에 대해 놀라워했다. 분명히 내가 전우들을 위해 한 행동들은 내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동만이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알라푸조프, 스테파노프, 갈레르가 법정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행동했는지를 생각하면 슬픔과 동시에 만족감을 느낀다.

(* 첫 번째 충격 때 일어난 재판으로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는 징역 10년, 갈레르는 징역 4년, 쿠즈네초프는 계급 강등의 판결을 받았다. 갈레르는 1950년에 사망하고 알라푸조프와 스테파노프는 스탈린 사후 1953년에 석방되어 복권된다. 그들의 석방 이유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글을 보면 쿠즈네초프가 힘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복권된 둘은 쿠즈네초프와 달리 죽을 때까지 해군에서 복무할 수 있었다.)

마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음에 균형이 잡혔고 해군동지들이 나의 부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자존심을 회복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아직 내게는 충분한 힘이 남아있었지만, 이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피로한 상황에 협심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려운 순간이 오면 철학적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을 여러 번 들었었다. 아마 더 좋은 처방은 아무도 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나는 항상 어린 시절 내 길을 선택한 때를 떠올렸다.

해군에 영혼을 바치는 것.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은 일이었다. 학창 시절은 언제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나쁜 일도 없었고 열심히 공부해서 우등으로 졸업했었다.

첫 장교로 임관했을 때도 좋은 추억만이 있다.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에서 복무했을 때는 인생 처음으로 엄청나게 많은 업무에 시달렸지만 경력을 위해서가 아닌 배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 즐겁게 일했었다. 내 첫 복무가 그렇게 즐거웠다는 것에 항상 감사한다.

그다음은 해군대학에서 지낸 몇 년이다. 모두가 친절했고 우리는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곳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고 나는 어려운 직책이지만 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부함장 직책을 요구했다. 열정을 가지고 순양함 '크라스니 캅카스'에서 복무를 시작했는데 다행히 그 배의 함장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내 주도권을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배를 지휘할 기회를 많이 준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 배의 평판은 좋았고 이것은 1939년에 내가 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의 함장으로 임명된 것에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순양함의 함장이 되고 싶다는 소중한 꿈이 실현됐다. 이때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건 언제나 즐겁고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을 어느 정도 치워주는 것 같다. 세상에 평생 큰 걸림돌 없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힘든 시기'를 피해야만 하는가? 내 삶의 기복은 너무 심했고, 이에 배운 교훈도 많았다. 산을 오를 때 주변 사람들 중 일부는 도와주고, 일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은밀하게) 방해한다.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면 도와주던 사람들은 도움을 멈추고, 일부는 도와줬던 과거를 후회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비웃기 시작하고 원래부터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은 사납게 돌을 던지며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다.

때때로 내 친구들은 나에게 적대적이던 사람들을 지나치게 신뢰한 게 내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지만 사람들을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불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혹독한 시대에서는 확실히 조심성과 검증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내가 어릴 때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성실하고 착했고 내게 유익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열심히 공부해라, 돈이나 지위를 추구하지 마라" 등등... 아마도 그들이 내 지나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키웠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만약 내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면 무엇을 위해 살 가치가 있고 무엇을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지 목적을 잃었을 것이다. 동시에 선하다고 생각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조차 비웃는 바보가 되지 않도록 적절한 선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것은 어리석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격동적이고 불안한 시대에 우리는 이전보다 더 생명을 위해 싸워야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도덕과 품위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와 관련된 사람은 특히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정치는 무자비한 일이며, 전쟁조차도 일종의 정치적 수단이다. 이익이 필요하다면 정치는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꽤나 특별한 은퇴를 했다.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이전 업무와 동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많은 동지들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나와 만나는 것을 기피했다. 이런 경험으로 나는 물질적 보장이 완전한 정신적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아직 필요하고 유용한 존재라는 만족감이 부족했다. 물론 이건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공공업무를 수행하고 세미나를 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것들은 너무 사소한 일이라 나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전에는 내 삶의 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다. 내 의지에 상관없이 복무가 중단되었고 나이와 건강이 끝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때때로 깊은 사색에 잠겨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내게 남은 시간과 한때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목표들, 그리고 아직 미래에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가끔씩 절망과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럴 때 명확한 목표 의식이 필요하다. 명확한 목표가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우울감과 질병과도 잘 싸울 수 있다.

시야를 좁히고 오로지 개인적인 순간들과 사건에만 집중하면 마음이 어둡고 우울해진다. 일어난 모든 것을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보면 객관적인 사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모든 일들이 긴 삶에서 일어난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 말이다.

내 인생이 곧 해군이라고 가정하고 생각한다면, 내가 해군에서 쫓겨났을 때 내 삶은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전체 사회, 국가, 조국 등 더 넓은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여전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과 목표는 남아있으며 그것을 위해 더 나은 건강과 상태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가족, 자녀, 가정 등 순전히 개인적인 일 외에도 조국 및 사회의 이익과 관련된 더 넓은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 겹치지 않고 조화롭게 삶을 이끌어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행운에 가까우며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이러한 목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지루하고 모든 게 불만일 것이며 자신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해군에서의 성공보다 조국의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며 일했다. 그것은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때때로 내 개인적인 일에 해를 끼쳤다. 지금은 그런 개인적인 일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을 실수라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부당한 처벌을 받아 직위와 계급을 잃었을 때는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해군에 남을 수 있었고 해군 동지들 사이에 있었으며 건강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6년의 상황은 달랐다. 일하는 것,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심지어 해군과 관련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박탈당하고 나이와 건강 상태도 더 나빠졌을 때 내 삶의 근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선 지금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모든 것에서 물러나 순전히 개인적인 삶을 살다 갈 것인가, 아니면 아직 사회 구성원 중 하나로서 조국의 이익을 위해 할 수 있는 목표를 찾을 것인가.

이론적으로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실행하고 해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아마도 나를 지켜보는 전직 해군 동지들 중 일부는 내가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쉽게도 삶의 지지대를 잃는다는 것은 훨씬 복잡한 것이다.

온갖 치욕을 겪어야 했던 40대 후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내와 건강이 필요했다. 재임명 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나는 마치 망치와 모루 사이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는 정치국이 나를 다시 불러준 것이고 그들은 호의적으로 나를 대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고 새로운 '늑대 굴'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그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견해와 정직한 태도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 스탈린이 사망하자 일이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고 나는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최선의 결과는 다른 곳으로 조용히 전근 가는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모든 부당하고 불합리한 비난을 겪을 운명이었다. "그를 처단하라" 외침이 시작되면 돌이 던져졌다. 돌을 던지는 사람들 중엔 내가 도와주고 잘 대해주던 사람들도 많았다.

신경적인 긴장감이 때때로 극한에 달했다. 나는 절대 울고 싶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이제 건강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균형을 잃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며 신중히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에서 나 자신을 찾아내야 했다.

이제 수많은 질문들에 답해야 했다. 어떤 목표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모든 인민에게는 조국의 발전, 성공이라는 매우 중요한 목표가 있다. 이 방향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아직까지는 내 건강이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가능하다면 여전히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회고록을 쓰면서 만족감을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내 회고록에 기술된 내용들은 현재와 관련이 없고 미래와는 더더욱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슬픔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는 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가 겪은 것은 언젠가 모든 인간들이 겪을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책과 사진을 보면 이미 얼마나 많은 지인과 친구들이 '더 나은 세상'으로 갔는지 확인하게 된다. 건강하고 대의를 위하던 그들은 이제 떠났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도, 높은 직급의 사람들도 자신의 차례가 되자 떠나갔다.

조금 모욕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이 험난하고 격동적인 시대에 피할 수 없는 것은 떠난 이들은 금방 잊힌다는 사실이다. 노력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남기려던 야심찬 사람들은 착각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고 그들의 흔적은 순식간에 덮여져버렸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그 누구도 비난받을 수는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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