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회고록] 대숙청에서 학교 동기를 구해준 쿠즈네초프 제독
글쓴이: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 ㅡ 대령, 해군 과학 박사 저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와 친밀했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23-1926년 동안 그와 함께 해군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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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즈네초프의 학교 동기 옐리세이 안드레예비치 체르노쇼크가 쓴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942년 5월 초 쿠즈네초프와 저는 케르치 방향으로 진군하는 파시스트 군대에 의해 위험한 상황에 처한 흑해함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흑해로 떠났습니다. 우리는 파시스트 폭격기에 의해 무자비하게 폭격을 당한 노보로시스크에 도착했고 노보로시스크 해군 기지 사령관인 홀로스티야코프 대령의 보고를 들은 쿠즈네초프는 즉시 방공 지휘소로 향했습니다. 방공 지휘관의 보고를 듣고 대공포의 위치를 살펴보던 쿠즈네초프는 도시의 특정 구역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은 우리 대공포의 위치를 연구해서 위험 지역을 우회했네. 대공포를 새로운 위치로 옮기는 것이 시급하다는 뜻이지. 새로운 위치는 여기가 좋을듯하니 다시 찾아올 폭격에 대비해 새벽까지 대공포를 조용히 옮겨놓게."
방공 지휘관이 새벽까지 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자 쿠즈네초프가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새벽까지 대공포가 내가 지시한 장소로 이동하지 않으면 자네는 총살일세."
그의 말에 방공 지휘관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저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홀로스티야코프에게 돌아가지."
그렇게 우리는 쿠즈네초프를 따라 방공 지휘소를 떠났습니다. 새벽이 되자 방공 지휘관이 모든 대공포가 지시한 장소에 설치됐다고 보고했습니다.
9시경에 바다에서 노보로시스크 쪽으로 향하는 대규모 파시스트 폭격기 무리가 포착됐습니다. 우리는 모든 광경이 잘 보이는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쿠즈네초프의 옆에는 해군 항공대 사령관 자보론코프, 흑해함대 항공대 사령관 에르마첸코, 스타비츠키 부제독 등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치 폭격기들이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대공포에 격추되어 추락하는 것을 흥분과 기쁨으로 지켜봤습니다. 나치 폭격기 무리가 정신없이 무질서하게 바다로 도망치기 시작하자 우리 전투기들이 나타나 도망가는 폭격기를 추격하여 격추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은 6~8대의 폭격기를 잃었고 쿠즈네초프는 능숙한 기동으로 여러 폭격기를 격추한 세 명의 전투기 파일럿들에게 주목했습니다.
"에르마첸코, 저 전투기들은 누가 모는건가?"
쿠즈네초프가 묻자 예르마첸코가 비행편대의 이름을 말해줬습니다.
"가서 우리 영웅 파일럿들에게 감사를 표하지."
우리가 비행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인원이 비행장에 사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비행대 지휘관에게 재빨리 소식을 전한 것 같았습니다. 전투기들이 착륙하고 있었고 쿠즈네초프가 물었습니다.
"지휘관 동지, 나치 폭격기를 격추시킨 파일럿들을 소개해 주겠나. 또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알려준다면 고맙겠네."
기운 넘치는 지휘관이 씩씩하게 보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민위원 동지, 파일럿들은 하급 장교들이며 오랫동안 중위가 되기를 꿈꿔왔습니다."
그때 흥분한 전투기 파일럿 세 명이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보던, 살아있는 해군 인민위원을 본 그들은 매우 수줍어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한 명 한 명에게 입을 맞추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그들에게 중위 계급을 수여하고 시계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내가 시계를 가지고 있나?"
쿠즈네초프가 제게 물었습니다.
"아뇨."
"모스크바에 돌아가면 즉시 인사 부서에 계급 부여와 시계 수여를 지시하고 시계를 보내주도록 하게. 그건 그렇고, 어려운 상황에서 정확하게 명령을 내린 방공 지휘관도 칭찬을 받아 마땅해."
쿠즈네초프는 항상 사람들의 공로를 적절하게 인정할 줄 알았습니다.
1946년 여름, 쿠즈네초프와 북방함대를 시찰할 때의 일입니다. 우리는 해군 기지 중 하나에 도착했습니다. 기지 사령관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정상적이라고 유쾌하게 보고했습니다.
"지휘관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함대사령관 동지."
쿠즈네초프는 기지 사령관을 교활하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내들에게 가서 어떤 보고를 해 줄지 들어볼까."
우리는 아파트 중 한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아파트는 어린 자녀를 둔 지휘관들의 아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가 그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아내들이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라비틀어진 야채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버터, 고기, 우유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불만들도 많았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참을성 있게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내 동지 여러분, 배급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할 것임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기지 사령관과 정치장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고 그들이 진실한 보고를 한 아내들을 꾸짖을지 칭찬할지 추측하는 건 흥미로웠습니다. 본부로 돌아오고 쿠즈네초프는 기지 사령관을 비난하지 않으며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아내들의 진실한 보고는 자네의 보고와 좀 다르군. 공급 부족에 대해 자네의 책임은 없는데도 왜 모든 것이 괜찮고 정상적이라고 속인 거지? 가족의 안녕과 부대의 분위기가 전투 효율성을 얼마나 많이 좌우하는지 기억하게."
함대 사령관을 만난 쿠즈네초프는 그에게 외딴 기지에 있는 지휘관 가족들의 배급량을 늘리라고 지시했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쿠즈네초프는 배급 담당 보로비요프에게도 동일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그러다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쿠즈네초프는 "지휘관 가족의 복지, 함대 전투 효율성이 내 복지보다 더 중요하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미코얀이 쿠즈네초프를 꾸짖고 경고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정부의 허가를 받게."
자오스트로프체프 해군소장의 부대에 속한 세 명의 수병이 형벌 부대로 보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명의 불량배가 부대 장교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장교를 구하기 위해 맞서 싸웠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알고 보니 두 명의 불량배는 NKVD 장교였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크렘린 직통 전화로 칼리닌에게 전화를 걸어 수병들의 사면을 요청했습니다. 칼리닌은 소련 최고회의에 청원서를 작성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일이 잘 풀렸고 수병들은 석방되어 자신들의 부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오스트로프체프는 이 사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습니다.
1946년 여름 쿠즈네초프, 트리부츠와 몇몇 해군 참모 지휘관들이 헬싱키 아니면 한코(잘 기억이 나지 않음)에서 탈린으로 돌아오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배의 우현이 바위에 부딪혔고 배가 기울어져 우리 모두가 갑판에 쓰러져 배 밖으로 떨어질 뻔했습니다. 분노에 찬 트리부츠가 항해사를 향해 격렬하게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트리부츠, 뭘 그리 화내는 거야? 저자가 자네를 공격했나?! 아마도 어제 폭풍으로 항로표지가 옮겨졌거나 핀란드인들이 옮겼겠지. 확인해 봐야겠어."
확인 결과 실제로 항로표지가 옮겨져 있었습니다.
1941년 12월, 대대장 한 명과 수병 두 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해병 여단 중 한 곳의 대표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단을 대표하여 쿠즈네초프에게 선물할 적당한 문구가 새겨진 신형 독일 자동소총을 가져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왠지 무섭네요."
"뭐가 말입니까?"
"인민위원을 실제로 본 적 없고 사진으로만 봐와서요."
"걱정하지 마시죠. 인민위원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고 그대들을 만나면 분명 기뻐할 겁니다."
내가 쿠즈네초프에게 해당 사항을 보고하자 그는 이미 방문해있던 선약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동지들, 잠시 보고를 중단하겠습니다. 전선에서 대표단이 도착했으니 그들을 환영해 줍시다."
대표단은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고 쿠즈네초프가 대표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선물을 받고 여단의 군사 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마찬가지로 따뜻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병사들과 장교들에게 선물에 대한 감사와 인사, 행운을 기원한 다음 그들에게 음식을 좀 주라고 지시했습니다. 대표단은 환대에 감동을 받고 떠났습니다.
1946년 말, 즈다노프와 불가닌 국방 인민위원이 쿠즈네초프를 크렘린으로 소환하여 어떻게 그런 결함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것에 대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보고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쿠즈네초프와 함께 갈레르, 로고프, 이사첸코프 해군중장, 그리고 저를 포함한 다른 여러 사람이 함께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결함의 원인을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결함 발생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왜 자네인가?"
"저는 해군을 이끌고 있으며, 해군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함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즈다노프는 쿠즈네초프의 대답에 동의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로고프가 쿠즈네초프가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예방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로고프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즈다노프가 로고프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누구지?"
로고프는 혼란스러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해군 정치부장입니다."
"그런데도 자네는 아무런 잘못도 관련도 없다는 건가? 자네는 왜 거기 있는 거지?"
일주일 후 로고프는 발트해 군사 지구로 배치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프토호프,크라브첸코, 자이둘린, 브도비첸코 등 몇몇 학교 동기들은 와인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병에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좋은 동지이자 책임 있는 직책에 도달한 매우 유능한 장교들이었고 쿠즈네초프도 그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의 불행을 알고 그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보직에서 해임되었고 일부는 해군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저와 친하게 지냈던 프토호프 대령이 기억납니다. 저는 그가 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는 해군에서 해임되고 결핵에 걸려서 술을 끊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습니다. 저는 가족의 비극을 힘들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아내와 10대 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어느 날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저는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만남은 우울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아내와 아들에게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술을 끊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끼며 해군을 꿈꾸는 아들에게 어떻게든 속죄하기 위해서 해군에 돌아가 해군으로 죽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프토호프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에게 나를 해군에 복직시켜 달라고 호소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어. 나와 자이둘린,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에게 너무 많은 폐를 끼쳤지 않나."라고 울먹였습니다.
저는 당시 레닌그라드에 있던 쿠즈네초프에게 매우 우울한 상태로 찾아갔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이를 알아차리고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침울해,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저는 쿠즈네초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집중해서 들어주어서 저는 용기를 내 말했습니다.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나는 자네에게 한 번도 개인적인 부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부탁하겠네. 프토호프를 복직시켜주게."
이 대화 중엔 인사부 아반킨도 함께 있었고, 다행히 그는 나를 지지해 주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침묵하다가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래, 알았네. 프토호프한테 내일 나를 찾아오라고 말해주겠나."
쿠즈네초프는 프토호프를 만나서 그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했습니다. 그는 어떤 비난이나 경고도 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좋아! 자신 있는 보직을 선택해 보게."
그리고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프토호프의 복직 명령서에 서명했습니다. 프토호프는 복직해 2-3년 동안 일하다 약 42세의 나이에 순직했습니다. 갈레르는 프토호프의 업무 능력에 매우 만족했었습니다.
쿠즈네초프에게 제독 견장과 그의 안녕을 빚진 할라모프 제독은 해군 참모장으로 총참모부에 파견되었습니다. 어느 날 할라모프는 쿠즈네초프에게 [국방차관 겸 소련 해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명령]이라는 서명이 적힌 문서를 보냈습니다. 저는 이 문서를 쿠즈네초프에게 보고했고, 할라모프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한 쿠즈네초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평소와 같이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라모프! 나는 자네의 예의 없는 행동에 놀랐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한다면 거기서 쫓아내겠어. 내가 자네를 총참모부에 보낸 것임을 잊지 말게!"
태평양 함대 사령관, 해군 인민위원, CPSU 중앙위원회 위원, 소련 최고의회 의원 등 공식적인 고위직이던 쿠즈네초프는 일반 사람들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세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확고하고 단호하게 언제나 진실만을 얘기했습니다.
해군에 이익이 필요하다면 그는 행동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그에게 개인적으로 안 좋은 운명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해군의 급진적이고 실용적이며 포괄적인 구조 개편, 최신 과학 기술, 특히 원자력 에너지의 최신 성과를 전투력 개발에 신속하게 도입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위선자, 사기꾼, 기회주의자, 게으름뱅이, 거짓말쟁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일에 주도권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 제안과 계획에도 인내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유용하고 좋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무례함과 굴욕, 모욕과 위협들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런 모욕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한테도 말입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만 처벌했으며, 처벌받은 사람들은 항상 벌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는 인간의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기꺼이 목소리를 냈고 항상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다른 탈출구가 없다고 확신할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때때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습니다. "나는 인민위원이며, 인민위원회에서 저지른 모든 실수는 1차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수를 한 진짜 범인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쿠즈네초프는 보복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이 가하는 모욕과 배은망덕함을 견뎌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함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 동정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쿠즈네초프는 학교, 사관학교, 군대에서 도움이 필요해 보이고 신경 쓰이는 동료들의 이름을 주의 깊게 보고 기억해두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옐리세이! 우리 학교 동지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우리 동기 중 몇 명이나 살아있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주게."
쿠즈네초프는 위대하고 힘들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높은 도덕적 자질, 영적 아름다움, 순수함과 매력으로 빛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모든 해군 장병들, 현재와 미래 세대의 해군 지휘관들이 본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그의 세대의 해군들은 여전히 쿠즈네초프에 대한 밝은 기억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원문
쿠즈네초프 전후 회고록에 헌정된 헌정글입니다.
https://coollib.com/b/264965/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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